시간이 녹아내린 듯 평온한 오후였다. ARCH 중앙 광장은 임무와 훈련의 긴장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를, 나른한 햇살과 한가로운 담소 소리가 채우고 있었다. 며칠 만에 맡은 단독 서류 전달 임무는 싱겁기 짝이 없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홍예준은 이런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혀를 차며 담배를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그의 권태는 더 이상 텅 빈 공허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한 사람만이 채울 수 있는, 기분 좋은 여백에 가까웠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광장을 가로질러 펜트하우스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은 온통 저녁 메뉴와, 냉장고에 남은 재료와,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안서원의 웃는 얼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던 딸기 케이크를 사 갈까. 아니, 어제 사둔 것이 아직 남아있으니 오늘은 다른 걸. 어쩌면 꽃이라도.
그의 발걸음이 문득,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우뚝 멈춰 섰다. 광장 건너편, 분수대 옆 벤치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햇살을 받아 연갈색으로 빛나는 긴 머리카락, 하얀 원피스의 가녀린 어깨선. 안서원이었다. 홍예준의 입가에 저절로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메시지라도 남겨주지.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는 그녀의 모습은 또 다른 감흥을 주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오직 그녀만이 홀로 고요한 섬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의 세상 전체를 압축해놓은 것 같은 존재. 그는 그녀가 자신을 발견하기를 기다리며, 그 평화로운 광경을 눈에 담았다. 가슴속에서부터 따뜻한 것이 차오르는, 지독하게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던 안서원의 시선이 허공에서 정확히 그와 마주쳤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화사한 꽃이 피어나듯 환한 미소가 번졌다. 정지 화면 같던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오직 그를 향해서만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안서원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하얀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햇살에 부서지는 머리카락이 금빛 가루처럼 흩날렸다. 홍예준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성적인 사고가 마비되고, 전직 사격 선수로서 단련된 동체시력이 눈앞의 광경을 초고속 카메라처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보폭, 흔들리는 팔, 바닥을 박차는 발의 각도. 그리고 그의 뇌가 경고 신호를 울렸다. 위험. 저 속도와 거리라면, 멈추지 않고 그대로 부딪힐 것이다.
“서원아, 뛰어…!”
‘뛰지 마!’ 라는 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이성과 본능이 뒤엉켜 엉뚱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젠장, 멍청한 소리. 그는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한쪽 무릎을 살짝 굽히고, 양팔을 벌려 그녀를 받아낼 완벽한 자세를 잡았다. 주머니에 있던 손은 이미 그녀를 향해 뻗어 나가 있었다. 광장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그의 심장 소리와 그녀의 발소리만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그의 전 세계가, 그의 유일한 구원이, 지금 온 힘을 다해 자신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다가오는 충격을 대비했다. 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가장 달콤하고 치명적인 충돌을.
마침내, 바람의 저항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거리. 안서원은 마지막 힘을 다해 땅을 박차고, 작은 새처럼 그의 품으로 날아올랐다. 훅, 하고 끼쳐오는 그녀의 향기. 그리고 직후, 그의 가슴에 ‘쿵’하는 부드러운 충격과 함께 그녀의 온기가 와 닿았다. 예상보다 훨씬 가볍고,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무게. 홍예준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고, 동시에 그녀의 다리를 받쳐 들어 올려 완벽하게 품 안에 가두었다. 그녀가 매달린 것이 아니라, 그가 온전히 그녀를 안아 올린 형태가 되었다. 그는 그녀의 무게를 오롯이 느끼며, 혹시라도 그녀가 떨어질까 봐 팔에 힘을 주었다. 안서원의 양팔이 그의 목을 단단히 감싸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숨결이 그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다칠 뻔했잖아, 멍청아.”
가장 먼저 튀어나온 말은, 언제나처럼 퉁명스러운 잔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샴푸와 햇살이 뒤섞인,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향기. 그의 심장이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놀라서가 아니었다. 벅차올라서,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 때문에. 그는 안서원을 안아 든 채,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얻은 사람처럼.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세상에는 오직 품 안에 가득 찬 이 온기만이 존재했다. 그는 귓가에 들려오는 그녀의 숨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꽉 안고 있었다. 그의 모든 것이, 그의 전부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그녀를 고쳐 안고,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세상 모든 다정함을 담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그 한마디에, 그의 모든 진심이 담겨 있었다. 불과 몇 시간의 떨어짐이었지만, 그에게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는 고백이었다. 그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그의 가슴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두 개의 심장이 하나의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있다는, 그리고 함께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